Chase Bliss Audio – 부티크, 기술적 낭만주의

Last Updated: 2026년 01월 05일By Tags: , ,

Digital Brain, Analog Heart

1. 기술적 낭만주의의 부상과 2026년의 지형도

2026년, 글로벌 악기 및 음향 장비 산업에서 ‘부티크‘라는 용어는 더 이상 소규모 공방의 수공업적 생산 방식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이는 고도화된 기술력과 제작자의 철학적 서사가 결합하여 사용자에게 단순한 기능적 만족을 넘어선 정서적 체험을 제공하는 ‘경험재’로서의 지위를 획득했다. 이러한 시장의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한 핵심에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 본거지를 둔 Chase Bliss Audio(이하 CBA)가 존재한다. 창립자 조엘 코르테(Joel Korte)가 2013년 설립한 이래, CBA는 지난 13년간 아날로그 회로의 불완전한 미학과 디지털 제어의 정밀함을 결합한 “Digital Brain, Analog Heart“라는 슬로건을 통해 이펙터 페달을 단순한 음향 변조 장치에서 악기 그 자체로 격상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글은 CBA의 브랜드 역사를 단순한 제품 출시의 나열이 아닌, 상실과 애도라는 개인적 서사가 어떻게 기술적 혁신의 동력으로 승화되었는지, 그리고 급변하는 글로벌 공급망과 환경 규제(RoHS) 속에서 어떻게 독자적인 생존 모델을 구축했는지를 다각도로 분석한다. 특히 2022년의 전면적인 D2C(Direct-to-Consumer) 전환과 2024~2025년의 ‘백트롤(Vactrol) 위기’에 대한 대응은 현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참조해야 할 중요한 경영학적 사례연구로 기능한다. 2026년의 시점에서 바라본 CBA는 더 이상 틈새시장의 이단아가 아니라, 기술과 예술, 그리고 비즈니스의 경계에서 새로운 표준을 제시하는 ‘거장(Master)’의 반열에 올라 있다.

2. 상실의 아픔에서 피어난 창조

2.1. 비극적 상실과 실존적 전환점

모든 위대한 브랜드에는 저마다의 창립 신화가 존재하지만, CBA의 기원은 유독 깊은 슬픔과 맞닿아 있다. 브랜드명인 ‘Chase Bliss’는 창립자 조엘 코르테의 형, 체이스 코르테(Chase Korte)의 이름과 그의 생전 철학에서 유래했다. 2007년, 조엘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기에 발생한 체이스의 갑작스러운 사망 사고는 조엘의 인생 항로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음주 운전 차량에 의해 형을 잃은 조엘은 깊은 상실감과 우울증에 빠졌으며, 이는 당시 그가 겪고 있던 말더듬증과 맞물려 세상과의 소통을 더욱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체이스가 남긴 유산은 조엘을 다시 세상 밖으로 이끌어내는 나침반이 되었다. 체이스는 비교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의 유명한 격언인 “Follow Your Bliss(당신의 지복을 따르라)”를 삶의 모토로 삼았었다. 이는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성공의 잣대가 아닌,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기쁨을 추구하라는 메시지였다. 형의 죽음 이후, 조엘은 안정적인 전기 공학자의 길 대신 자신이 진정으로 열정을 느끼는 오디오 이펙터 설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따라서 2013년 설립된 Chase Bliss Audio는 단순한 상업적 법인이 아니라, 형제애에 대한 영속적인 헌사이자 상실의 고통을 창조적 에너지로 치환하려는 프로젝트의 성격을 띤다.

2.2. 말더듬증과 인터페이스 디자인의 상관관계

조엘 코르테의 개인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소는 그가 평생 안고 살아온 말더듬증이다. 유창한 언어적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그에게 있어, 음악과 기계 장치는 언어를 우회하여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는 대체 언어였다. 이러한 배경은 CBA 특유의 사용자 경험(UX)과 마케팅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 CBA의 페달 인터페이스는 텍스트 의존도를 최소화하고 물리적 직관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복잡한 메뉴 다이빙(Menu-diving)이 필요한 LCD 스크린 대신, 모든 기능을 노브와 스위치로 표면화시킨 디자인은 언어적 설명 없이도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기기와 ‘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는 조엘이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던 방식, 즉 복잡한 미사여구 대신 본질적인 행위와 결과로 소통하려는 의지가 투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둘째, 브랜드의 초기 성장을 견인한 유튜브 채널 ‘Knobs’와의 협업 영상은 이러한 ‘침묵의 미학’을 마케팅적으로 완성시켰다. 이 영상들은 내레이터의 목소리 없이 오직 텍스트 자막, 고요한 배경, 그리고 제품을 조작하는 손동작과 사운드만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조엘이 느끼는 언어적 부담감을 해소하는 동시에, 시청자로 하여금 불필요한 청각적 정보(말소리)를 배제하고 오로지 이펙터가 만들어내는 소리의 질감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이는 2026년 현재 부티크 페달 시장의 데모 영상 표준(Standard)으로 자리 잡았으며, 장애를 가진 창립자의 약점이 오히려 브랜드의 가장 강력한 차별화 포인트로 승화된 사례라 할 수 있다.

2.3. ZVEX 시절과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유산

2008년부터 2013년까지, 조엘 코르테는 미네소타의 전설적인 이펙터 브랜드 ZVEX Effects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도제식 수련을 거쳤다. 설립자 재커리 벡스(Zachary Vex)는 ‘Fuzz Factory’와 같이 전기적으로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기기를 통해 업계의 이단아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 조엘은 회로 설계의 기술적 기초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발견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혁신”이라는 ZVEX의 철학을 흡수했다.

이는 CBA의 초기 제품군인 Warped Vinyl이나 Wombtone이 보여준 ‘통제된 혼돈(Controlled Chaos)’이라는 콘셉트로 이어졌다. ZVEX가 야생마처럼 날뛰는 사운드를 그대로 노출했다면, CBA는 그 야생마에게 정교한 고삐(디지털 제어)를 채워 사용자가 원할 때만 날뛰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초창기 CBA 제품들이 고수했던 나무 상자(Wooden Box) 패키징 역시 ZVEX의 핸드페인팅 감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공산품이 아닌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했던 조엘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3.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완성

3.1. 아날로그 심장, 디지털 두뇌

2013년 당시 이펙터 시장은 ‘순수 아날로그’와 ‘고성능 디지털’로 양분되어 있었다. 아날로그 애호가들은 디지털의 차가운 질감을 거부했고, 디지털 애호가들은 아날로그의 제한된 기능을 답답해했다. CBA는 이 두 진영의 경계를 허무는 하이브리드 아키텍처를 통해 시장에 충격을 주었다.

  • 아날로그 신호 경로 (Analog Heart): Warped Vinyl부터 시작된 초기 라인업은 100% 아날로그 신호 경로를 유지했다. 기타의 원음은 디지털 변환(AD/DA) 과정을 거치지 않고 BBD(Bucket Brigade Device) 칩이나 포토셀, 트랜지스터 등 아날로그 소자를 통과한다. 이를 통해 아날로그 특유의 따뜻함, 배음의 풍부함, 그리고 비선형적인 반응성을 그대로 보존한다.

  • 디지털 제어 (Digital Brain): 그러나 이 아날로그 소자들을 제어하는 ‘손’은 디지털이다.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아날로그 회로의 각 파라미터를 제어하는 전압(Control Voltage, CV)을 생성하고 관리한다. 이를 통해 아날로그 페달에서는 불가능했던 프리셋 저장 및 호출, 정교한 MIDI 제어, 그리고 복잡한 LFO(저주파 발진기) 변조가 가능해졌다.

3.2. DIP 스위치: 프로그래밍 가능한 아날로그

CBA 페달의 뒷면(또는 상단)에 위치한 16개의 붉은색 DIP 스위치(Dual In-line Package Switch)는 브랜드의 기술적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대변하는 아이콘이다. 이 스위치들은 단순한 옵션 설정 기능을 넘어, 사용자가 페달의 내부 동작 알고리즘을 직접 재구성할 수 있는 ‘모듈러 신디사이저’ 수준의 자유도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사용자는 DIP 스위치를 조작하여 페달의 ‘Volume’ 노브를 LFO의 파형에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게(Ramping) 만들거나, 익스프레션 페달을 밟았을 때 ‘Depth’는 증가하고 ‘Rate’는 감소하도록 설정할 수 있다. 이는 고정된 회로의 기능을 사용자가 창의적으로 해킹(Hack)하고 재정의할 수 있게 함으로써, 페달을 단순한 효과기가 아닌 능동적인 연주 파트너로 변모시켰다. 2026년 현재까지도 이 정도 수준의 하드웨어적 커스터마이징을 제공하는 브랜드는 극히 드물다.

3.3. Preamp MKII와 전동 페이더

2020년 출시된 ‘Preamp MKII’는 CBA가 추구해온 하이브리드 기술의 정점(State-of-the-Art)을 보여준 기념비적 제품이다. 포틀랜드의 앰프 제조사 Benson Amps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페달은 기타 이펙터 역사상 최초로 전동 페이더(Motorized Faders)를 도입했다.

  • 기술적 구현과 UX 혁신: 기존의 디지털 멀티 이펙터나 프리셋 지원 페달들은 치명적인 UX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프리셋을 변경했을 때, 물리적인 노브의 위치와 실제 설정값이 일치하지 않는 ‘파라미터 점프’ 현상이 그것이다. Preamp MKII는 대형 레코딩 콘솔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동 페이더를 소형화하여 탑재함으로써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 사용자가 프리셋을 변경하면 6개의 페이더가 물리적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설정값을 시각적으로 즉시 보여준다. 이는 “보이는 대로 들린다(What you see is what you hear)”는 아날로그적 직관성을 디지털 프리셋 환경에서 구현한 혁명적인 시도였다.

  • 라이브 환경의 변화: 어두운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뮤지션들에게 전동 페이더는 단순한 시각적 유희가 아니라 생존 도구였다. 현재 값이 무엇인지 즉각적으로 파악하고 미세 조정할 수 있는 기능은 라이브 퍼포먼스의 안정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2026년 현재, 이 기술은 CBA의 하이엔드 라인업인 ‘Automatone’ 시리즈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3.4. 협업을 통한 기술 생태계의 확장

CBA는 독자적인 개발뿐만 아니라 타 브랜드와의 적극적인 기술 제휴를 통해 자신들의 기술적 한계를 돌파해왔다. 이는 폐쇄적인 경쟁보다는 개방적인 협력을 지향하는 조엘 코르테의 경영 철학을 반영한다.

  1. Benson Amps (Preamp MKII): 크리스 벤슨(Chris Benson)이 설계한 Chimera 튜브 앰프의 회로를 FET 트랜지스터 기반으로 재설계하여 페달 안에 집어넣었다. CBA는 여기에 가변형 다이오드 클리핑, 파라메트릭 EQ, 그리고 전동 페이더 제어 시스템을 결합하여 ‘꿈의 드라이브 페달’을 완성했다.

  2. Meris (CXM 1978): DSP 분야의 강자인 Meris와의 협업을 통해 1978년도 렉시콘(Lexicon) 224 디지털 리버브의 사운드를 재현했다. Meris가 알고리즘 설계를, CBA가 하드웨어 및 아날로그 신호 경로, 전동 페이더 인터페이스를 담당하는 분업 구조를 통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냈다.

  3. Cooper FX (Generation Loss & Acquisition): 로파이(Lo-fi) 이펙터의 선구자인 톰 마제스키(Tom Majeski)와의 협업은 ‘Generation Loss’ 한정판 출시로 시작되었다. 이 협업의 성공은 2021년 11월, CBA가 Cooper FX를 전격 인수하고 톰 마제스키를 수석 개발자로 영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인력 충원이 아니라, Cooper FX가 보유한 독보적인 시간 기반 DSP 기술과 VHS 테이프 시뮬레이션 알고리즘을 CBA의 핵심 역량으로 내재화했다는 점에서 기술적 퀀텀 점프의 계기가 되었다.

4. D2C 전환과 희소성 경제학

4.1. 2022년 D2C 피벗

2022년 5월, 조엘 코르테는 전 세계 딜러 및 유통사와의 거래를 전면 중단하고, 자사 웹사이트를 통해서만 제품을 판매하는 100% D2C(Direct-to-Consumer) 체제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이는 안정적인 유통망을 스스로 걷어차는 위험한 도박으로 보였으나, 2026년 시점에서 평가할 때 CBA의 생존과 성장을 담보한 가장 결정적인 전략적 판단이었다.

  • 배경: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위기: 코로나 팬데믹 이후 반도체 등 부품 가격이 폭등하고 물류비가 상승하면서 제조 원가가 급격히 높아졌다. 기존의 유통 구조(제조사 -> 디스트리뷰터 -> 딜러 -> 소비자)에서는 각 단계별 마진(약 30~40%)을 보장하기 위해 소비자 가격을 비현실적으로 인상해야 했다. 조엘은 “품질을 타협하거나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리는 대신, 중간 유통 마진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 고객 가치 보존: D2C 전환을 통해 CBA는 제품 가격을 합리적인 수준에서 동결하거나 인상 폭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또한, 유통 마진을 연구개발(R&D)과 고객 서비스(CS) 강화에 재투자했다. 전 세계 무료 배송(관세 포함) 정책과 30일 반품 보장 제도는 소비자가 딜러샵에서 직접 테스트해 보지 못하고 구매해야 하는 불안감을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데이터 주권: 고객과 직접 거래함으로써 판매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확보하고, 수요 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이는 악성 재고를 줄이고 생산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4.2. 한정판 마케팅과 리셀 시장의 역학

CBA는 제품의 희소성(Scarcity)을 정교하게 제어하여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전략을 구사한다.

  • Ayahuasca와 Veblen Good 효과: 서브 브랜드인 Abracadabra Audio를 통해 출시한 ‘Ayahuasca’는 극소량만 제작되었으며, 독특한 핸드페인팅 아트워크로 인해 수집가들의 표적이 되었다. 리버브(Reverb) 등 중고 시장에서 이 페달은 정가의 5배가 넘는 $2,500~$3,000에 거래되기도 했다. 이러한 고가 리셀 현상은 CBA 제품을 단순한 소비재가 아닌 투자 가치가 있는 자산, 즉 베블런재(Veblen Good)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 Mystery Box (2024)의 실험: 2024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진행된 ‘미스터리 박스’ 이벤트는 재고 소진과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마케팅이었다. 소비자는 정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박스를 구매하고, 무작위로 고가의 페달이나 단종된 희귀 페달을 받는 행운을 기대했다. 그러나 2025년에는 관세 문제와 박스 제작 비용 상승 등 물류상의 비효율성을 이유로 이 이벤트를 중단했는데, 이는 D2C 환경에서도 물리적 물류 비용이 여전히 기업의 수익성을 위협하는 변수임을 보여준다.

  • Small Batch Bliss (2025): 리셀러들에 의한 시장 왜곡을 방지하고, 실수요자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2025년부터 ‘Small Batch Bliss’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특정 기간(예: 1개월) 동안 주문받은 수량만큼만 생산하는 ‘주문 제작(Made-to-Order)’ 방식이다. 이를 통해 CBA는 재고 부담 없이 실험적인 제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되었고, 소비자는 “품절”의 공포 없이 제품을 구매할 수 있는 윈윈(Win-Win) 구조를 확립했다.

4.3. 독립적 지배구조의 힘

CBA는 외부 벤처 캐피털(VC)이나 대기업의 투자 없이 조엘 코르테가 100% 소유권을 가진 비상장 개인 기업이다. 이는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단기적 목표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브랜드 철학을 고수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수익성이 불확실한 실험적 제품(예: Habit, Blooper)을 과감히 출시하거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등 경영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지배구조 덕분이다.

5. RoHS 사태와 2025년의 격변

5.1. Vactrol Ban과 주력 제품의 강제 단종

2024년 말, CBA는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다. 유럽연합(EU)과 영국이 시행하는 유해물질 제한지침(RoHS)의 예외 조항이 만료되면서, CBA의 아날로그 페달 라인업의 핵심 부품인 ‘백트롤(Vactrol/LDR)’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백트롤은 빛을 내는 LED와 빛을 감지하는 포토레지스터를 결합한 광학 소자로, 포토레지스터에 포함된 카드뮴(CdS)이 환경 규제 대상이었다.

  • 기술적 딜레마: 백트롤은 특유의 느린 반응 속도(Memory Effect)와 비선형적인 저항 변화 곡선을 가지고 있어, 디지털 제어로도 아날로그적이고 유기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데 필수불가결한 부품이었다. 조엘 코르테는 “디지털 제어 환경에서 백트롤을 대체할 수 있는 완벽한 소자는 없다”고 토로했다. 결과적으로 Preamp MKII, Thermae, Warped Vinyl HiFi, Dark World, Condor HiFi 등 브랜드의 근간을 이루던 5종의 주력 제품이 유럽 및 영국 시장에서 판매 금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5.2. 위기 관리: 투명성과 책임 경영

이 위기 앞에서 CBA가 보여준 대응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1. 공개적 인정과 단종 선언: 규제를 편법으로 우회하려 하기보다, 해당 제품들의 단종을 공식화하고 그 기술적, 법적 이유를 블로그와 영상을 통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는 고객의 알 권리를 존중하는 태도였다.

  2. Legacy Brand 운영: 규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미국 시장을 위해 chaseblisslegacy.com이라는 별도 채널을 개설했다. 이곳에서는 남은 재고와 미국 내 생산분을 판매하여, 규제 밖의 소비자들에게는 계속해서 제품을 공급하는 유연함을 보였다.

  3. 평생 보증(Lifetime Warranty) 확대: 단종되는 제품들에 대해 ‘평생 보증’을 선언했다. 고장 시 무료 수리는 물론 왕복 배송비까지 전액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이었다. 조엘은 “이 페달들이 쓰레기매립지로 가는 것을 원치 않으며, 평생 연주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단종으로 인해 불안해하는 기존 고객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브랜드의 책임감을 증명하는 강력한 조치였다.

5.3. 2026년의 새로운 지평

2026년 현재, CBA는 ‘포스트 백트롤(Post-Vactrol)’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기술적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백트롤 없이도 유사한 유기적 질감을 낼 수 있는 새로운 아날로그 회로 설계와 고도화된 DSP 모델링 기술이 적용된 차세대 페달들이 연구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RoHS 위기는 CBA가 과거의 유산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기술적 진보를 강제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6. 사회적 영향 및 커뮤니티

6.1. 나무 상자(Wooden Box)의 서사와 단종

초창기 CBA 제품을 상징했던 나무 상자는 단순한 포장재가 아니었다. 이는 조엘의 아버지가 차고에서 직접 로고를 찍고, 어머니와 이웃들이 스테인을 칠해 만든 ‘가족의 땀’이 어린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2019년,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관세 인상과 물류 비용 증가, 그리고 부모님의 노령화로 인한 노동력 문제로 인해 나무 상자는 종이 박스로 대체되었다.

당시 팬덤의 아쉬움은 컸으나, 조엘은 이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며 “포장재보다는 제품 자체의 품질에 집중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사건은 CBA가 가내수공업 단계에서 전문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은 성장통이자, 효율성과 감성 사이에서 내린 현실적인 결단이었다.

6.2. 사회적 책임(CSR)과 연대

조엘 코르테는 기업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 BLM 운동 지원: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 당시, 미니애폴리스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서 지역 사회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Preamp MKII의 시리얼 넘버 1번 제품을 경매에 부쳐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고, 다른 부티크 브랜드들과 연대하여 ‘Raffle for Black Lives’ 모금 행사를 주도했다.

  • 기부 문화: CBA는 정기적으로 판매 수익의 일부를 사회적 정의, 환경 보호, 예술 교육 관련 단체에 기부하고 있으며, 이는 브랜드의 윤리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7. CBA vs. Competitors

부티크 페달 시장의 양대 산맥인 Strymon, Empress Effects와 비교했을 때, CBA의 독보적인 위치는 ‘사용자 경험(UX)’과 ‘철학’의 차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부티크 이펙터 브랜드별 비교 분석

비교 항목 Chase Bliss Audio Strymon Empress Effects
핵심 철학

Creative Chaos & Serendipity

(창의적 혼돈과 우연한 발견)

Uncompromised Audio Fidelity

(타협 없는 오디오 품질)

High-Fidelity Utility Tool

(고해상도 실용주의 도구)

제어 방식

DIP 스위치 + 전동 페이더 (No Screen)

촉각적이고 물리적인 조작 중시

OLED 스크린 + 다기능 노브

메뉴 다이빙을 통한 정밀 제어

LED 인디케이터 + 토글스위치

빠르고 직관적인 시각 피드백

내부 아키텍처

Hybrid (Analog Heart / Digital Brain)

디지털 제어 아날로그 회로

100% High-End DSP

완벽한 디지털 알고리즘

High-End DSP & Analog Dry

투명한 사운드 지향

사용자 경험

실험적, 우연성, 파괴적 사운드 탐구

“소리를 망가뜨리며 노는 즐거움”

정제된, 스튜디오급, 예측 가능한 사운드

“완벽하게 다듬어진 톤”

깨끗하고 기능적인, 엔지니어링 툴

“원하는 소리를 정확히 구현”

확장성 MIDI, CV/Expression, Ramping (LFO) MIDI, MultiSwitch, Nixie S/W MIDI, Control Port, SD Card Update
대표 제품 Preamp MKII, Mood MKII, Blooper BigSky MX, Timeline, Iridium Zoia, Echosystem, Compressor MKII
타겟 유저 사운드 디자이너, 실험적 아티스트, 수집가 워십(CCM) 밴드, 세션 연주자, 프로듀서 스튜디오 엔지니어, 페달보드 빌더

Strymon이 “완벽한 스튜디오 사운드”를, Empress가 “정확한 엔지니어링 툴”을 제공한다면, CBA는 “영감을 주는 불완전함“을 판매한다. CBA의 DIP 스위치와 램핑 기능은 사용자가 의도하지 않은 소리를 우연히 발견하게(Serendipity) 유도하며, 이는 음악 창작 과정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촉발하는 도구로서 CBA 페달이 사랑받는 이유다.

8. 혁신의 궤적 (2013-2026)

  • 2007: 체이스 코르테 사망. 조엘 코르테, “Follow Your Bliss”를 가슴에 새김.

  • 2008-2013: 조엘, ZVEX Effects에서 엔지니어로 근무.

  • 2013: Chase Bliss Audio 설립. 첫 제품 Warped Vinyl (MK I) 출시. 아날로그+디지털 하이브리드 개념 정립.

  • 2014: Wombtone (Phaser) 출시.

  • 2015: Gravitas (Tremolo) 출시.

  • 2016: Tonal Recall (Analog Delay) 출시. BBD 칩을 사용한 아날로그 딜레이의 재해석.

  • 2017: Brothers (Overdrive/Fuzz) 출시. Resonant Electronic Design과 협업.

  • 2018: Thermae (Pitch Shifting Analog Delay) 및 Dark World (Reverb) 출시. Cooper FX 및 Keeley와 첫 협업.

  • 2019: Blooper (Looper) 킥스타터 캠페인 성공. 3D Systems 인수 제안 거절. Wooden Box 패키징 단종.

  • 2020: Preamp MKII 출시 (Benson Amps 협업, 전동 페이더 도입). BLM 지지 선언.

  • 2021: Cooper FX 인수 및 톰 마제스키 영입. CXM 1978 (Meris 협업) 출시.

  • 2022: D2C (Direct-to-Consumer) 전면 전환. 딜러망 철수. Habit (Echo/Collector) 출시.

  • 2023: MOOD MKII 출시 (스테레오 지원 등 업그레이드).

  • 2024: Lossy (Goodhertz 협업) 출시. 미스터리 박스 이벤트 진행.

  • 2024 (하반기): RoHS 규제로 인한 ‘백트롤 위기’ 발생. Preamp MKII 등 5종 유럽 단종 발표.

  • 2025: Small Batch Bliss 시스템 도입 (On-Demand 생산). 미스터리 박스 중단. Legacy 사이트 오픈.

  • 2026 (현재): 포스트 백트롤 기술이 적용된 차세대 아날로그 라인업 개발 및 디지털 페달의 고도화 지속.

9. 상처 입은 치유자의 기술

2026년의 조엘 코르테와 Chase Bliss Audio가 써 내려간 연대기는 단순한 성공한 스타트업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그것은 기술(Tech)이라는 차가운 그릇에 인간의 가장 뜨거운 감정인 ‘슬픔’과 ‘사랑’을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한 증명이다. 형을 잃은 상실감은 ‘Bliss’를 쫓는 동력이 되었고, 소통의 장애였던 말더듬증은 가장 직관적이고 촉각적인 인터페이스를 낳았다.

CBA의 여정은 끊임없는 ‘모순의 조화’였다. 1960년대의 낡은 기술인 백트롤과 2020년대의 첨단 로봇 기술인 전동 페이더를 결합했고, 기업의 생존을 위해 유통망을 끊어내면서도 고객과의 정서적 유대는 더욱 강화했다. RoHS라는 규제의 파도 앞에서도 그들은 제품을 포기하는 대신, 제품에 담긴 정신을 지키기 위해 ‘평생 보증’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다.

이제 CBA는 단순한 이펙터 제조사를 넘어,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영혼을 수호하는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페달은 연주자들에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 불완전함 속에 당신만의 음악이 있다”고 속삭인다. “Follow Your Bliss”라는 문구는 13년이 지난 지금, 단순한 추모사를 넘어 기술과 예술의 경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전 세계 모든 창작자들을 위한 앤섬(Anthem)으로 울려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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